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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짱의 국내여행 사진블로그


어찌보면 6월 촛불집회는 6월 민주항쟁와 무척 닮아있다.

초기 광우병 쇠고기 수입 문제로 시작되었던 국민의 분노는

정부의 독재와 독단의 태도에도 분노하고 있다.

역사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한다.

6월 항쟁을 기르는 촛불집회 또한 소수의 불법시위대에 선동되지 말고

평화시위로 무사히 마쳐야 할 것이다.


87년 6월 민주항쟁

5공화국은 중앙정보부같은 정보통치기관이 판을 치고, 말한번 잘못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만신창이가 되도록 고문을 당하던 시기였다.

이 5공화국의 말기쯤인 1987년 1월 14일에 물고문으로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죽은 사건이 일어났다. 마침 그때는 대통령을 직접선거로 뽑을 것이냐, 간접선거로 뽑을 것이냐 하는 논의가 뜨겁던 때였기 때문에 이 사건은 큰 파문을 몰고 왔다. 그 파장은 추모대회와 평화대행진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국민운동본부"라는 범국민적 기구를 탄생시켰다. 순결한 한 대학생을 고문으로 죽여놓고서도 발뺌을 하는 그 부도덕성이 국민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던 것이다.

이런 흐름에 위기를 느낀 당시 정권은 4월 13일, 대통령 직선을 위해 법을 고치는 문제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라는 이른바 "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이에 국민들은 더욱 큰 분노를 느끼면서 불같이 일어났다. 호헌반대 여론이 각계각층으로 번지면서 교수,교사,시민단체,예술인,연예인 등이 잇따라 성명을 발표하고 나섰다.

그러던 중에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군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죽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자 그 동안 마음으로만 지지를 보내던 시민들도 거리로 나섰다. 6월 10일, 민정당이 노태우 대표위원을 대통령후보로 추대하던 그날, 전국에서는 "독재타도","직선제 쟁취"의 함성이 온종일 메아리쳤다. 6월 26일에 있었던 평화대행진의 날에는 전국에서 1백 80여 만명의 국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또한 항의의 표시로 자동차는 경적을 울리고, 전국의 교회와 사찰에서는 일제히 종을 쳐댔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되자 마침내 6월 29일 노태우 대통령후보는 국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뜻을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의"시국수습을 위한 8개항"을 선언하였다.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빛나는 승리를 거두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6월 민주항쟁은 진정한 민주화 시대의 발판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사회 각 부문마다 군사문화 추방과 민주화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우리 민족의 최대과제인 민족통일의 물꼬도 조금씩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13대 대통령에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은 자신이 약속했던 6.29선언의 민주화 조치를 그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실천하지 않았다. 앞으로 들어서는 새 정부들의 개혁조치들은 바로 6월항쟁을 완성시켜나가는 과정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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