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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짱의 국내여행 사진블로그

대구지명의 유래

大邱의 옛이름은 多伐(다벌), 達伐(달벌), 達弗城(달불성), 達句伐(달구벌), 達句火(달구화). 大丘(대구)등으로 바뀌었다.
"불"과 "벌"은 우리말의 모음접변에 의한 것으로서 같은 말인데 평지, 평야, 촌락, 성읍을 뜻하는 말이라 한다.
"達(달)"의 뜻은 圓(원), 周(주)등 넓은 공간을 뜻하므로, 결국 達句火(달구화)와 大邱는 서로 같은 뜻이 된다.


大丘(대구)라는 명칭이 처음 역사에 나타나기는 신라 757年(경덕왕 16年) 주, 군, 현 의 명칭을 중국식 이름으로 고친 때부터이다. 그러나 이 개칭은 다음 혜공왕 이후의 기사에 옛 명칭인 달구벌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한 동안 양쪽이 함께 쓰이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達句伐(달구벌)이 大丘(대구)로 바뀐 것은 통일 이후 唐(당)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은 신라가 모든 제도 문물을 중국식으로 정비해 가는 변화의 한 산물이다. 종래 여러 가지로 불리우던 벼슬 이름이나 지방 이름을 원칙적으로 2자의 한자로 개칭하였다. 개칭의 방법은 음을 딴 것, 뜻을 따르는 것, 아름답게 고치는 것, 글자를 줄이는 것 등이 있는데 달구벌이 大丘(대구)로 바뀐 것은 음을 딴 경우에 해당한다 하겠다.


『丘』자가 『邱』로 바뀐 것은 조선왕조 英正(영정)시대부터이다. 1750年(英祖 26) 『丘』자를 다른 자로 고치자는 상소가 있었다. 『丘』자가 孔子(공자)의 이름자인 까닭에서였다. 영조는 이것을 신기를 좋아하는 경망한 풍조의 소산이라 하여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대구 사람들은 점차 達(달)자 대신 脚(각)자를 쓰기 시작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처음으로 大邱로 나오기는 1779年(正祖 3)5月 부터이다. 그러나 그 후에도 『丘』와자가 『邱』가 혼용되다가 哲宗(철종)이후는 1850年(哲宗 원년) 공사간에 모두 大丘를 쓰지 않고 大邱로 쓰게 되었다.

참고문헌 : 대구의 향기/출처: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1id=6&dir_id=60101&docid=77851

<<동명유래>>

남구소재 동명 유래

●대명동 大明洞
이 명칭의 유래는 임진왜란 시 조선에 원병으로 왔던 명 의 장수 두사충(杜師忠)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그는 왜란이 끝난 후 고국에 돌아가지 않고 귀화했는데 조정에서는 그에게 땅을 주어 살게 하였다. 그러나 수 만리 떨어진 타국에서 항상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였다. 이에 그는 땅을 모두 내어눟고 최정산(最頂山)밑으로 집을 옮겨 고국인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골이라 했다고 한다.
또는 대덕산 아래 제일 크고 맑은 동네라는 뜻에서 대명동이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원래 대구부 상수서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금암동을 병합하여 대명동이라(달성군 수성면에 편입)했다. 1918년에 일부는 대봉동에 넘겨주었다. 대구에서 行政洞의 수가 가장 많은 곳이다. 1980년에 일부가 남산동에 편입되었고 1985년 이후 현재 1∼11동까지 있다.
●봉덕동 鳳德洞
이 명칭은 1914년에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봉산동(鳳山洞) 과 덕산동(德山洞)을 합쳐 부른 것이다. 원래는 대구부 상수서면(上守西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에 통합되면서 달성군 수성면에 편입되었다. 1918년 지방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대구부에 편입되고 일부지역을 대봉동에 넘겨주었다.
1938년에 대구부 동부출장소 봉덕동으로 1963년에 남구 봉덕동으로, 1970년에 봉덕 1.2.3동으로 분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천동 梨泉洞
원래 이 일대는 배나무실이라고 불러졌는데, 이것은 지금의 수도산 밑에 배나무가 많았으며 그 밑에 맑은 샘이 솟았다고 하여 ‘배나무 있는 샘’이라는 뜻에서 이천이라 불려졌다고 한다. 남구 대봉 2.3동에 포함되어 있다가 1963년에 일부는 중구에 편입되고 그 나머지 일부가 1980년에 남구 이천 1.2동으로 분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달서구(達西區) 소재 동명유래

●갈산동 葛山洞
이 말을 뒷산에 칡나무가 많아 `칡뫼'로 부리어 졌는데, 칡뫼가 갈뫼로 다시 갈산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대구부 감물천면에 속햇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달라 갈산동 이라고 해서 달성군 성서면에 편입되었다.
●감삼동 甘三洞
이 지역의 유래에 대한 설화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이 지역이 원래 감이 많이 나는 곳이었는데, 300여 년 전 어느 날 원님이 이 지역을 지나가다가 감나무에 달린 붉은 감을 보고 그 탐스러움을 감탄하였는데, 이에 마을에서 감을 원님께 대접하면서 마을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더니 감이 매우 달고 맛이 있어 세 개나 먹었으니 ‘감삼동’이라 하였다고 한다.
둘째. 이 지역의 땅모양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낮은 산줄기가 길게 뻗어 이 마을 한 가운데서 끝나는데 바로 이곳의 땅모양이 세 장군이 태어날 형상이었다. 그런데 이런 말이 널리 퍼지게 되면 도리어 마을 사람들이 해를 입기 쉽다. 하여 이 이야기를 숨기기 위해 그 부근에 샘이 세 곳에 솟아날 것이라고 하였다 한다. 이후 얼마 안되어 이 마을에 정말 세 곳에 샘이 생겨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그 샘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하여 감삼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대구부 달서면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에 감삼동 이라고 하여 달성군 달서면에 편입되었다.
●대곡동 大谷洞
본래 한실이라 불리어 졌는데, ‘한실’이란 큰골, 즉 골이 깊고 크다는 뜻이다. ‘한’의 뜻은 크다 또는 넓다 로, 한자로 표기하면 大이고, ‘실’의 뜻은 고을 마을이란 뜻으로 한자의 谷이다. 즉 한실은 큰 마을이라는 뜻이므로 한자로 표기하여 대곡이 되었다. 대구부 인홍면(仁興面)에 속햇던 지역으로 1914년의 송정동 일부와 합쳐 달성군 화원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달성군 월배면으로 소속이 바뀌었고 , 1981년에 다시 대구에 편입되었다.
●도원동 桃源洞
골이 매우 그윽하고 경치가 아름다워서 중국의 무릉도원과 같다고 하여 도원골 도는 도원리라 하였다. 대구부 월배면 지역으로서 1914년에 원덕동을 합하여 도원동이라 하여 달성군 월배면에 편입하였다.
●두류동 頭流洞
1988년에 달서구를 신설하면서 내당동 일부를 떼어내 만들어 졌다. 현재1∼3동까지 있다. 두류동의 명칭은 바로 두류산에서 따온 것이다.
●본동 本洞
1987년에 본리동에서 떨어져 나와 남구에 속하면서 본동이라 명칭하였다. 1988년에는 신설된 달서구에 편입되었으며, 1990년에 송현 2동의 일부를 편입 시켰다.
●본리동 本里洞
옛날에는 작촌(鵲村)이라 불려졌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150여년 전 현재 본리초등학교가 있는 주변지역에 가치가 많이 살았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도한 지루지 라고 도 하는데 이곳 토질이 진흙땅이어서 통행에 많은 불편을 주어 이렇게 불렸다고 한다.
대구부 감물천면에 속했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감천리(甘川里) 작촌동(鵲村洞)을 합아여 본리동이라고 하여 달성군 성서면에 편입하였다. 이 지역은 1981년 7월 1일 달성군에서 대구 광역시로 편입된 곳이다. 1987년에 본리동 일부를 떼어 본동을 신설하고 월성동 일부를 본리동에 편입하였고 1988년에는 신설된 달서구에 편입되었다.
●상인동 上仁洞
이 지역에 있는 상인산의 이름을 따서 상인리(上仁里)라 하였다. 대구부 월배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에 체정동과 본리동을 합하여 상인동이라 하여 달성군 월배면에 편입되었다.
●성당동 聖堂洞
본래 ‘삼댕이’또는 ‘성댕이’라고 불렸다. 1910년부터 성당동이라 불렸는데, 그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가 잇다. 하나는 이 지역의 산 모습이 못을 중심으로 하여 용이 승천하는 모양으로 길지의 의미를 지닌 성당으로 불렸다고 한다. 또 하나는 천주교 성당이 있었다고 하여 성당동으로 불려졌다고 한다. 이 성당은 일제시대 때 만들어진 것으로 현 대성사 위쪽(두류산 서쪽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곳이 대구지역 독립운동 장소로 발각되어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 철거 폐쇄되었으며 1960년 두류산 공원 개발로 순환도로가 개설 될 때까지 그 터와 사택이었던 집이 있었다고 한다. 대구부 달서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구부에 다시 편입되었다. 1985년에 성당동이 1.2동으로 분리되었으며, 1987년에 일부가 송현동에 편입되고 1988년에는 신설된 달서구에 편입되었다.
●성서 城西
본래 대구부 城 서쪽이 되므로 성서면이라 하여 10개동(파산, 파호 ,금회, 호림, 신당, 이곡, 율제, 용상,용하, 죽전)을 관할하였는데, 1914년에 12개동(파산, 파호, 호림, 신당, 이곡, 용산, 죽전, 갈산, 장동, 장기, 본리, 송현)으로 개편되면서 달성군에 소속되었다. 1957년에 대구시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에 달성군에 환원되었다. 그러다가 1981년 대구광역시 승격 시에 달성군 성서읍 일원에서 새로 서구에 편입되었다가 1988년 신설된 달서구에 편입되었다. 1982년에 성서 출장소 3개 행정동을 설치하여 운영하다가 1989년에 성서 2동이 2동과 4동으로 분리되었다. 행정동으로는 성서이지만 파호.파산.호림.신당.이곡.용산.죽선.갈산.장동.장기.본리.송현의 12개 동이 속해있다.
●송현동 松峴洞
원래 이 지역에 솔고개가 있었기 때문에 송현이라 불러졌다고 한다. 본래 대구부 감물천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매자동과 취령동, 구암리를 합하여 송현동이라 하여 달성군 성서면에 편입하였다가 1957년에는 대구시에, 1963년에는 월배면에 편입되었다. 1981년 달성군 월배읍 송현동이 대구광역시 남구 송현동으로 편입되었으며 1986년에 송현 1.2동으로 분리되고 1988년에 달서구에 편입되었다.
●신당동 新 洞
신당지라는 못에서 이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대구부 성서면에 속했던 지역으로서 1914년에 점기(店基)를 합하여 신당동이라 하여 달성군 성서면에 편입하였다. 1981년 현재 1동과 2동으로 분리되어 있다.
●용산동 龍山洞
와룡산(臥龍山)밑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용산동이라 이름지어 졌다고 한다.
대구부 성서면에 속한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龍上洞과 龍下洞을 합하여 용산동이라 하여 달성군 성서면에 편입되었다.
●월배 月背
이곳에 있는 달비골의 이름을 따서 달배면(達背面) 또는 월배면이라 하였다. 본래 대구부에 속하여 7개리(원덕, 도원, 진천, 오복, 상인, 채정, 본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에 조암, 인홍, 화현, 내면의 일부를 합하여 달성군 월배면으로 소속이 바뀌었고(도원, 대천, 상인, 유천, 월성, 월암, 진천의 7개동 관할)1958년에 대구시에 편입되었다.
1963년에 다시 달성군에 환원되었다가(성서면의 송현동 편입, 1973년에 화원면의 대곡동 편입)1981년에 대구광역시에 편입되었다. 편입 될 당시 남구 월배 1.2동으로 나뉘어 졌다가 1988년에 달서구에 편입되면서 월배 1.2.3동으로 나누어지고 1990년에 월배 1∼4동까지 나뉘어 졌다가 현재 도원, 대천, 상인, 유천, 월성, 월암, 진천, 송현, 대곡 등의 9개 동을 관할하고 있다.
●월성동 月城洞
대구부 조암면의 지역인데 1914년에 일리와 광수동을 합하여 조암의 위쪽이 되므로 上洞이라 하여 달성군 월배면에 편입하였는데 1957년에 대구시에 편입 될 당시 기존의 상동과 혼동을 피하여 월배면과 달성의 이름을 따서 월성동이라 하였다. 이후의 변천은 월배의 변천과 동일하다
●월암동 月岩洞
대구부 조암면의 지역인데 1914년에 이리와 개상동을 합하여 조암의 아래쪽이 되므로 하동이라 하여 달성군 얼배면에 속하였다가 1957년에 대구시에 편입되면서 기존의 명칭과 혼동을 피하여 월배와 조암의 이름을 따서 월암동이라 하였다.
●유천동 流川洞
‘유천’은 말 그대로 흐르는 내라는 뜻으로서, 琵瑟山 동북단에서 시작되어 월배면의 桃源洞의 상류로 하고 구라동과 유천동 사이를 흐르는 내로서 연장이 11km나 되는데, 이 하천의 이름을 따서 동네이름을 유천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원래 대구부 화현내면(花縣內面)의 지역으로,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부미동(富彌洞), 일부와 진천동 일부를 합쳐 유천동이라 지칭하였고 달성군 월배면에 편입되었다.
●이곡동 梨谷洞
김해사람 허재라는 선비가 마을을 개척했는데, 1610년 선원 김상용이 그의 문인인 상무헌 허득과 허재 양공을 위해 그의 호를 붙인 이름이 선원이다. 이 마을은 배나무가 많다 하여 배실이라 불렸다고 한다.
대구부 성서면에 속했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통페합에 따라 율제동(栗提洞)을 합하여 이곡동 이라 하고 달성군 성서면에 편입되었다. 1981년 이곡1동과 2동으로 분리되었다.
●장기동 長基洞
원래 구씨와 장씨가 살던 곳이었는데 구씨가 망하고 장씨가 마을을 이끌어 왔다고 하여 구자가 빠지고 ‘장씨터’라는 뜻의 長基로 불려졌다고 한다. 또 하나의 설은 옛 장터가 있던 지역으로서 장터 구장터 또는 場基라 하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대구부 감물천면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 장기동이라 하여 달성군 성서면에 편입되었다. 이후의 변천은 성서의 변천과 동일하다.
●장동 壯洞
본래 장골이라 하였다. 대구부 감물천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에 당정동과 합해져서 달성군 성서면에 편입되었다.
●죽전동 竹田洞
원래 이 지역에는 대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부업으로 대나무 갈퀴를 만들어 서문시장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판매하였는데, 이렇게 대나무 갈퀴를 많이 생산하는 곳이라 하여 대발골. 죽박골 또는 竹田으로 불리게 되었다. 대구부 성서면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에 죽전동이라 하여 달성군 성서면에 편입되었다.
●진천동 辰泉洞
옛날 진천동 일대에는 4개의 자연부락, 새악단, 송정동, 용천동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五福村이 오늘의 진천동이다. 원래 이 곳에(약700년전)500세대가 살고 있다하여 五百이라 하였는데 , 이 五百이 五福으로 변음하여 오복촌으로 불리다가 다시 진천으로 불려지게 되었다.‘진천’이란 말은 이 마을에 있는 샘에서 유래하였는데, 이 샘은 수량이 풍부하고 물맛이 좋아 널리 알려 졌으며 미리샘(辰泉:일명 텃샘, 참샘)이라 부르게 되었다. 약 50년 전 우물을 개수하다가 샘독에서 큰 기둥만한 향나무 뿌리가 발견되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원래는 신라 達句火縣에 속하였고, 고려 때는 壽昌郡에, 조선 선조 때 대구부 월배면에, 1914년에 오복동과 인홍면의 송정동을 합하여 진천동이라 하고 달성군 월배면에 편입하였다. 이후의 변천은 월배와 동일하다.
●파산동 巴山洞·파호동 巴湖洞
1270년경에 韓씨·朴씨가 이곳을 개척하여 범어·강창이라 불렸는데, 범어라는 것은 강에 물고기가 많이 뛰어올라 뜬다고 하여 칭한 이름이다. 巴山이란 명칭은 파산 밑에 있다. 하여 이렇게 불렸는데, 1914년에 금회동(琴回洞)을 합하여 파산동이라 해서 달성군 성서면에 편입하였다. 巴湖라는 명칭 역시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에 따라 江倉의 일부를 갈라서 파산과 琴湖의 이름을 따서 지었고, 달성군 성서면에 편입되었다. 파산동의 옛 이름은 머무동또는 머무강창이라고 하는데, 머무동은 금호강으로 올라오던 소금배가 머무는 동네라 하여 생긴 이름이다. 강창은 조선시대에 세운선(稅運船)이 머무던 곳으로 파산동에도 설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여기에서 유래되어 이 지역이 강창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현재는 성서 3동에 속해있다.
●호림동 狐林洞
들 한복판에 숲이 홀로 우거져있다 하여 500여 년 전에는 홀림으로 일컬어졌다. 그후 1730년경 마을 앞 당산 느티나무 밑을 지나던 과객이 笏자가 좋지 못하다고 하여 여우전설이 있는 동네라는 뜻으로 狐 자를 써 호림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대구부 성서면이 있던 지역으로 1914년에 호림동이라 하여 달성군 성서면에 편입하였다.


동구(東區) 소재 동명 유래

●각산동 角山洞
원래 이 지역에는 쇠뿔처럼 생긴 바위가 있었으므로 이 바위를 소방우, 소바우 또는 한자식으로 우암동이라 불렀다. 그 후 구한말인 1907년 이곳에 부임한 縣監 송헌면(宋憲冕)이 이곳의 지명이 자신의 조상인 牛岩 宋時烈(1607∼89)의 호와 같다고 하여 牛의 角과 岩의 山자를 따서 각산동이라고 고쳐 불렀다고 한다. 1914년에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각산동에 인근의 하막동을 병합하여 경산군 안심면에 편입하였으며 1981년 7월1일에 대구시가 광역시로 승격하면서 동구에 편입되었다.
●검사동 檢沙洞
원래 이곳은 인근을 흐르는 琴湖江에 의해 모래가 퇴적되어 형성된 벌판이므로 곳곳에 고운 모래가 많이 쌓여 있었다. 이곳 모래는 곱기가 비단과 같이 고운 모래라는 뜻에서 錦沙라고 불렀고 이 지역도 금샛벌. 금사리라 하였다. 1914년의 행정구역개편과정에서 인근의 연천동을 병합하여 달성군 해안면에 편입하면서 그 이름도 검사동으로 바꾸었다. 이는 일제가 이 지방의 지명에 ‘비단금’자를 붙여 부르기에는 이름이 너무 아름다워 모래를 일일이 검사해야한다고 하면서 ‘검사할 검’자로 바꾸어서 동명을 검사동으로 정하였다고 한다. 그 후1940년 달성군 동촌면 검사동으로 되었다가 1957년 대구시 확장과 더불어 대구시에 편입되었다.
●괴전동 槐田洞
현재는 남아있지 않지만 원래 이 지역에는 공예품의 재료로 사용되는 괴목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마을의 이름을 여기에서 착안하여 괴명골이라 하였다가 현재의 괴전동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괴전동에는 괴동(槐洞:괴몬골). 송전(松田: 솔밭골)의 자연부락이 있었다. 괴몬골은 鷄鳴洞이라 부르는데 이는 왕건이 견훤과의 싸움에서 패하여 도망하다가 이 마을에서 새벽닭소리를 들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괴동과 송전동을 합하여 괴전동이라 하였다 한다.
●금강동 琴江洞
현재의 금강동은 주변에 금호강이 흐르고 있는 지역이다. 원래 이 마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마을에 차가운 물이 나오는 샘이 있다고 하여 마을을 냉천동(冷泉洞: 냉칭이)으로 불렀다고 한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마을 앞을 흐르고 있는 금호강의 이름을 따서 금강동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내곡동 內谷洞
원래 이 마을에서 현재의 다락원으로 가는 긴 계곡에 갈대가 무성하여 사람들은 마을 이름을 ‘노곡(蘆谷)’또는 ‘노실(蘆室)’이라 불렀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 마을이 위치한 지역의 골이 깊다고 하여 내곡동으로 불렸다고 한다.
●내동 內洞
사람들은 이 마을이 미대동의 안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속골, 소곡으로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 마을 의 이름도 한자식으로 내동이라 부르고 달성군 공산면에 편입하였다가 1938년 대구시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57년 다시 공산면에 환원되었다가 1981년 대구시가 광역시로 승격되면서 대구시에 편입되었다.
●능성동 能城洞
현재의 능성동은 능성, 양뱅이, 아리깍단, 주막, 지경(地境), 큰 마을 등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다. 능성이란 지명은 이 마을의 형세가 城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인근의 양방동을 합쳐 능성동이라 하고 달성군 공산면에 편입하였다가 1981년 대구시가 광역시로 승격되면서 대구시에 편입되었다.
●대림동 大林洞·사복동 司福洞
옛날부터 이 지역은 시인과 문사가 많이 배출되었고 글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하여 원래에는 時洞이라 불리어졌다. 그리고 시동은 가운데 있는 언덕을 경계로 그 동쪽의 작은 마을을 작은 시동, 서쪽의 큰마을을 큰시동 또는 큰말. 大洞이라 불렀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서쪽의 큰말은 인근의 임천동(林泉洞)을 합하여 大林洞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동쪽 의 작은 시동은 복이 많은 지역이라는 뜻에서 사복동이라 부르면서 경산군 안심면에 편입되었다가 1981년에 대구시에 편입되었다.
●덕곡동 德谷洞
덕곡동은 인근의 道德山 아래에 있는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러한 마을 위치에 따라 이 마을을 덕산(德山) 또는 덕곡(德谷)으로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근의 上利洞을 합하여 德山里라고 부르고, 달성군에 편입하였다. 그후 1957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덕곡동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도동 道洞
원래 이 지역은 해안현의 뒤에 해당되므로 뒷골 또는 뒷동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과정에서 도동으로 개정되면서 달성군 해안면에 편입하였다가 1957년 대구시 확장에 의하여 대구시에 편입되었다.
●도학동 道鶴洞
도학동은 도장(道藏)골(洞), 안(內)鶴洞, 外鶴洞, 학(鶴)골(谷), 鶴淨洞, 모구정(木瓜亭) 등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를 자연부락을 합하고 이들 자연부락의 이름을 따서 도학동이라 하고 달성군 공산면에 편입하였다. 1957년 대구시에 편입되었다.
●동내동 東內洞·신서동 新西洞
초초 초례봉(醮禮峰) 줄기를 따라 자연부락이 동, 서에 위치하고 있다. 처음에는 동쪽의 마을 곧 현재의 東內洞 지역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이후 동내동의 서쪽에 新村 곧 현재의 新西洞이 새로이 형성되었다. 사람들은 이들 자연부락을 그 위치에 따라 각기 東골과 西골이라 불렀다. 이후 약 230년 전 문화 柳씨들이 이 마을에 정착하여 집성촌을 형성하면서 그들은 동쪽의 안쪽 부락을 동내동, 서쪽에 새로이 생긴 마을을 신서동으로 고쳐 불렀다.
●동호동 東湖洞·서호동 西湖洞
이 지역은 갈대가 부성한 늪지대로서 호수(못)가 곳곳에 산재하고 있었다. 매여동(梅余洞에)서 내려오는 하천은 이 늪지대를 지나서 금호강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원래 이 지역에는 오례역(吾禮驛)이 있었다고 하여 吾禮村(里)이라 하다가 이 하천을 중심으로 두 마을로 나뉘어 동쪽을 동호동, 서쪽을 서호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둔산동 屯山洞
①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 싸우기 위하여 이곳에 군대를 주문한 데서, 또는, ②조선시대에 군영지가 이 지역에 있었던 까닭에 이 지역을 둔지미 또는 둔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인근의 대암동, 칠동, 상동을 병합하여 둔산동이라 행정구역명을 정하고 달성군 해안면의 관할하에 두었다. 그후 1957년 대구시 행정구역 확장에 의하여 대구시에 편입되었다.
●매여동 梅余洞
①이 지역은 주위의 산이 매화꽃 모양으로 오목하고 흰모래가 섞여 하얗다고 하여 임진왜란 이후 이곳에 처음으로 정착하여 살았던 사람들은 마을 이름을 梅花라 불렀으며, 그 후 다시 매여동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②醮禮峰과 환성산(環城山) 사이의 반계(磻溪) 상류에 위치한 매여동은 초례붕 너머에 있는 마을이므로 매너머, 매너미, 매여(里)라고 불렀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비슷한 한자음을 사용하여 매여동이라 표기하게 되었다.
●미곡동 米谷洞
현재의 미곡동 지역은 원래 3개의 자연부락이 下中心, 龍田, 장터가 위치하고 있다. 하중심은 이 마을이 팔공산의 산줄기가 칠곡군과 경산군으로 나뉘어지는 경계의 산줄기 밑에 위치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용천은 마을의 지형이 龍과 같다고 하여 붙여졌으며 장터는 1925년부터 공산면의 場이 이 곳에 서기 시작하였으므로 불리어진 이름이다. 이렇게 불리어진 3개의 자연부락이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대구시로 편입되면서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통합하여 그 이름을 미곡동이라 하였다.
●미대동 美垈洞
조선 명종 때 蔡松潭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에 정착하였는데 당시 그는 이 마을의 인근에 美垈寺라는 절이 있는 것에 착안하여 마을 이름을 미대동이라고 명칭하였다고 한다.
●방촌동 芳村洞
이 지역은 인근에 내(川)가 흐르고 있으므로 원래 防川 또는 防村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인근의 격양리(擊壤里)를 병합하면서 하나의 동으로 편성하여 방천 또는 방촌과 音은 비슷하면서 땅이 기름지고 물이 풍부하여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라는 뜻의 한자어인 방촌동이라 명칭하고 달성군 동촌면에 편입하였다. 그후 1958년 대구시로 편입되었다.
●백안동 百安洞
원래 이 마을에 百源書院이 있었던 까닭으로 백원 또는 백안이라고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백안동 이라 하고 달성군 공산면에 편입하였다가 1981년에 대구시에 편입되었다.
●봉무동 鳳舞洞
현재의 봉무정이 있는 곳에 호수를 만들기 위하여 구덩이를 파게 되었는데 이 때 땅속에서 鳳이 나와서 북쪽으로 날아갔다가 한다. 이후 사람들은 이곳을 봉이 춤추는 洞이라는 뜻에서 봉무동 이라고 불렀다.
●부동 釜洞
이 지역에 그릇 가마가 있었으므로 가마 골 또는 부동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인근의 九明洞, 月川洞을 병합하여 釜洞이라고 정하면서 달성군 해안면에 편입하였다. 그후 1957년 대구시의 확장과 더불어 대구시에 편입되었다.
●불로동 不老洞
왕건은 927년 견훤(甄萱)과의 팔공산싸움(현재의 동화사와, 파계사 삼거리)에서 대패하여 단신으로 파군재를 넘어 도망하였다. 이 때 왕건은 이 마을이 이르렀는데 노인과 부녀자들은 모두 피난을 가서 보이지 않고 젊은 사람들만 살고 있었기에 이후 불로동 이라 불리어지게 되었다.
●상매동 上梅洞
원래 이 마을은 소나무가 많은 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松下里라고 불러왔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 마을이 높은 산밑에 있으며 매화나무가 많다고 하여 상매동으로 동명을 정하였고 이후 지금까지 그대로 불려지게 되었다.
●송정동 松亭洞
원래 송정동 마을 한가운데에는 옛날부터 정자가 있었는데 그 곳에는 오래 된 소나무가 있었다. 그 후 조선 중기에 이르러 그 곳의 소나무가 말라서 죽자 마을 사람들이 소나무를 심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마을 이름도 소나무와 정자의 이름을 따 송정동 이라 부르게 되었다.
●숙천동 淑泉洞
숙천동 부레골에서 숙천초등학교 사이에 샘이 몇 군데 있었다. 현재에는 비록 숙천초등학교 교정에 샘이 하나 남아 있고 나머지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샘물이 차고 맑으며 마르는 때가 없어 사람들은 이를 숙(淑)샘(숙새미)라고 불렀다. 이후 사람들은 이 마을을 한자식으로 숙천동이라고 불렀다.
●신기동 新基洞
현재의 반야월 역이 위치하고 있는 이 지역은 원래 한양도로가 통과하던 곳으로 객인이 쉬어 가는 주막이 있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농사를 지으면서 새로운 마을을 형성하게 되자 이후 사람들은 마을 이름을 새터라고 불렀다. 이후 새터를 한자식으로 신기동 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신룡동 新龍洞
이 마을은 팔공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이 마을에는 신령스러운 龍이 살다가 하늘로 승천하였다는 전설이 깃든 龍池라는 못이 있다. 신룡동이라는 마을 이름은 이러한 전설에서 유래한 전설이다.
●신무동 新武洞
신라 27대 선덕영왕이 인근의 夫人寺를 창건하였는데 이후 사람들은 부인사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이 마을을 夫人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처음으로 신무동이라 개칭하여 오늘날까지 불리어 지고 있다.
●신천동 新川洞·신암동 新岩洞
1778년(정조3) 대구판관 李 (이서)가 대구부의 중심을 가로질러 흐르던 하천에 제방을 쌓아 현재의 신천이 흐르는 위치로 물줄기를 돌려 새로이 하천을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신천이다. 신천동은 바로 이러한 신천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신천동이라고 이름이 불리어진 것이다. 그리고 신천동 아래편의 바위가 많은 곳에 들어선 마을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마을의 이런 특징에 착안하여 이 마을을 신암동이라 불렀다.
●신평동 新坪洞


半 半夜月에서 대구에 들어오는 동쪽 입구에 위치한 이 지역은 원래 新德里와 坪里로 불리는 두 개의 조그마한 자연부락이 동, 서로위치하고 있다. 현재의 서구에 평리동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동명이 같아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이 지역의 이름을 신덕리의 ‘신’과 평리의 ‘평’자를 따서 신평동이라고 하였다.
●용계동 龍溪洞
①원래 이 지역은 옛날부터 九龍谷이라 부르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 마을 뒷산의 모양이 龍과 비슷하고 마을에는 시내가 흐르고 있어 용계동이라고 불렀다. ②현재의 용계동에는 임진왜란 후에 생겨난 것으로 여겨지는 자연부락이 九龍里와 金溪里가 있다. 구용리는 아홉 정승이 살았던 까닭으로, 금계리는 인근 하천에서 금이 났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구용리와 금계리의 龍과 溪자를 합하여 용계동으로 칭하였다고 한다.
●용수동 龍水洞
원래 이 마을에는 지정사라는 절이 있었고 이 절 밑에는 깊은 동굴이 있었다. 그 곳에는 용이 살았는데 이 용은 굴 앞의 샘물을 먹고 하늘로 승천하였다. 이 후 사람들은 이 물을 용이 마신 물이라는 뜻에서 龍水또는 龍泉이라 하였으며 마을 이름도 용수동이라 불렀다.
●율암동 栗岩洞
이 지역의 옛 이름은 九岩洞이었다. 이는 마을에 9개의 큰 바위가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이 지역의 외곽을 흐르고 있는 栗下川가에는 큰 밤나무 숲과 바위를 마을의 표상으로 삼아 '밤나무 栗'자와 '바위 岩'자를 합하여 율암동으로 동명을 정하였다.
●율하동 栗下洞
원래 이 지역의 옛 이름은 방계동이었다. 이 지역에는 밤나무가 많아 온 마을이 밤나무 숲을 이루고 있으므로 이후 사람들은 이것의 지명을 방계동에서 율하동으로 고쳐서 부르게되었다. 또한 매여동에서 시작하여 인근을 흐르고있는 하천의 이름도 梅余川에서 栗下川으로 바꾸어 불렀다.
●입석동 立石洞
현재 동촌 비행장이 위치하고 있는 이 지역은 원래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으며 들판 곳곳에는 선돌 10여 개가 흩어져 있었다. 비행장 건설과 경지정리가 진행되면서 선돌이 모두 없어지고 말았지만 원래 선돌(立石)이 서있었던 마을이란 뜻에서 입석동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중대동 中大洞
현재의 중대동이 자리하고 있는 지역에는 원래 中里, 한걸(大渠洞), 새미골, 택리동 등의 자연부락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들 자연부락을 합쳐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삼고 이들 자연부락의 첫 글자를 합하여 중대동이라 하였다고 한다.
●지묘동 智妙洞
지묘동이라는 마을 이름은 ①팔공산싸움에서 왕건이 견훤에게 패하여 도망하였는데 이 때 신승겸 등 신하들이 기묘한 술책으로 완건을 탈출시켰다는 데서 유래한 지명이라고 하며, 또는 ② 옛날 이 마을에는 智妙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유래한 지명이라고도 한다.
●지저동 枝底洞
원래 지저동은 현재의 지저동이 위치하고 있는 곳의 건너편 산, 곧 향산 밑에 있던 마을이었다. 향산 밑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갓밑, 간밑 또는 枝底, 枝底里라 불렀다. 1914년 때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지저동이라 해서 달성군 해안면에 편입되었다가 1957년 대구지역 확장과 더불어 대구시에 편입되었다. 그후 원래의 지저동이 동촌 비행장으로 편입되어 거주하던 사람들은 현재의 지저동으로 이주하게 되었지만 사람들은 그들이 전에 살던 마을 이름인 지저동을 이주한 지역에도 그대로 붙여 불렀다.
●진인동 眞仁洞
현재의 진인동이 위치하고 있는 지역에는 원래 眞靜洞, 仁山洞, 唐洞 등의 마을이 있었다. 1914년 이들 마을을 합쳐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편성하고 그 이름 역시 이들 마을 이름의 첫 자를 합하여 진인동이라고 하였다.
●평광동 坪廣洞
원래 이곳은 대구부 하북촌면 지역으로 坪里洞과 廣洞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 지역을 하나로 통합하면서 평리와 광동의 이름을 따서 평광동이라 하여 달성군 공산면에 편입하였다. 그 후 1957년 대구시가 확장되면서 대구시에 편입되었다.
●효목동 孝睦洞
본래 이 지역에는 작은 못이 있었으므로 소못골, 소목골 또는 효목리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원래의 효목리와는 전혀 의미가 다른 비슷한 音의 한자어를 붙여 효목동이라 부르고 달성군 수성면에 편입하였다. 그후 1938년 대구부가 확장되면서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북구(北區) 소재 동명 유래

●검단동 檢丹洞
원래 이 지역에는 옛날부터 神堂이 있었으므로 검댕이 또는 검단이라 불러졌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검단동이라고 동명을 정하고 달성군 성북면에 편입하였다가 1938년 대구부의 확장에 의하여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고성동 古城洞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대구 역에서 오봉로 사이에 위치한 이 지역에 옛 성터가 있었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 지역을 일본식으로 錦町이라 불렀다. 해방 후 일본식의 행정구역명을 고치면서 동명을 이곳에 옛 성터가 남아 있었던 것에 착안하여 고성동이라고 붙이게 되었다.
●관음동 觀音洞
지금은 없어졌지만 약 500년 전 이 마을에는 관음사라는 절이 있었다. 관음동이라는 이름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구암동 鳩岩洞
구암동은 함지산(函芝山) 서쪽에 북쪽 인근의 비로실, 운암동, 웃기명, 아랫기명, 미륵골 등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졌다. 이 지역 동남쪽에 있는 함지산 산록의 숲 속에는 여러 가지 열매가 풍부하여 해방 전까지만 해도 주위에 있는 바위들이 하얗게 될 정도로 많은 비둘기 떼들이 모여들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여기에는 착안하여 비둘기 鳩와 雲岩洞의 岩자를 합하여 구암동이라고 하였다.
●국우동 國優洞
①국우동이라는 이름은 반포천(反甫川)에 흐르는 물이 인근의 돌을 적시어 국가의 살림을 넉넉하게 한다는 의미를 담은 다음과 같은 한시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流川反甫於道德山 乳口乳臾如北反甫
濕野之比國優伸額 國優則民泰平民額
②원래 국우동에 옛 이름은 구우리였는데 구우리라는 명칭은 이 곳에 아홉 마을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러한 구우리가 音이 비슷한 한자로 옮겨지면서 그 의미가 전혀 다른 국우동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금호동 琴湖洞
옛날에는 현재의 금호동, 사수동이 합하여 문주 마을이라고 불러졌다.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현재의 금호동 지역의 이름을 금호강변에 위치하고 있다고 금호동이라고 정하였다.
●노곡동 魯谷洞
원래 이 지역에는 넓은 논이 펼쳐져 있었으므로 논실 또는 노실, 논촌, 노촌 또는 노곡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비슷한 한자어를 붙여 노곡동이라 하여 달성군 성서면에 편입하였다. 그 후 1938년 대구부가 확장되면서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노원동 魯院洞
이 지역은 원래 서구 院垈洞의 일부였다. 197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원대동의 일부가 원대동에서 분리되어 북구로 편입되면서 주민들의 의견에 따라 복구 노곡동의 魯와 서구 원대동의 院자를 따서 노원동이라고 동명을 정하였다.
●대현동 大賢洞
대현동이라는 동명은 1970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처음으로 사용된 것으로 한학자 柳奭佑옹이 지었다. 즉 인근에 경북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는 점에 유의하여 큰 선비들 많은 배출된 마을이라는 뜻으로 대현동이라고 명칭하였던 것이다.
●도남동 道南洞
이 마을은 道德山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다. 도남동 이라는 이름은 이러한 마을의 지리적 위치에서 유래하였다.
●동변동 東邊洞·서변동 西邊洞
동화사에서 흘러 내려오는 東華川을 경계로 마을이 위치하고 있는 지역에 따라 그 동, 서를 각 동편마 또는 동변동, 서편마 또는 서변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동천동 東川洞
이 마을의 서쪽에는 大川이 흐르고 있다. 동천동이라는 이름은 이 대천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하였다.
●동호동 東湖洞
고려후기 이 마을이 낙향하여 낚시로 세월을 보내는 隱士가 있었다. 당시 선비들이 즐겨 읊조리던 시에는 東湖라는 시구가 들어 있는데, 전국적으로 이 시구를 본 따 동호라고 불리는 지명이 130여 곳이 된다. 동호동이라는 이름도 이렇게 하여 붙여진 지명들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매천동 梅川洞
원래 이 지역에는 매남, 못안, 장태실 등의 자연부락이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시대 광해군 때 啞軒 宋遠器가 광해군의 폭정을 간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자 자신의 호를 병어리라는 뜻에서 啞軒이라고 고치고 현재의 매천 1동 지역에 내려와 梅易書院을 세워 후진을 양성하였다. 梅南 이라는 마을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또한 현재의 매천 2동 지역은 마을 앞에 팔거천이 흐르고 마을 뒤에는 소나무 숲으로 둘러 쌓여 있어 松川이라고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를 자연부락을 하나의 동으로 통합하였는데 매남의 梅와 송천의 川자를 따서 매천동 이라고 이름을 정하였다.
●복현동 伏賢洞
①후백제 견훤이 신라에 침입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워 신라의 왕으로 삼고 돌아가는 길에 군사를 이곳에 매복 시켰다가 추격해 오는 고려 왕건의 군대를 맞아 금호강을 사이에 두고 싸워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이곳은 권훤념 또는 복현암, 복현리라 불려졌다고 한다. ②복현동 60번지와 94∼1, 2번지 야산에는 경주 이씨 논복공 문중의 묘지가 있었는데 이 묘지는 7대조의 茂實公이 영조대(1728) 奮武一等功臣에 봉해지면서 영조가 하사한 땅으로 '엎드려(伏) 현모한다(賢)'는 뜻으로 이곳의 지명을 복현 동으로 칭하였다고 한다.
●사수동 泗水洞
사수동은 대구광역시와 지천면의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인근의 금호강과 금호강의 枝川에 둘러 쌓여 있어 집중호우 때는 늘 침수되는 지역이다. 사수동 이라는 이름은 이 마을의 이러한 자연환경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산격동 山格洞
①이곳 뒷산이 매처럼 생겼으므로 매자미, 미자미, 또는 줄여서 매잠, 미잠, 매참 이라 불렀다. 이후 순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고치게 되었는데 '매참'을 '산인덕'으로 잘못 해석하여 山隔(산격)으로 표기하였다. ② 이곳에 위치한 연암산의 지형이 우뚝 솟아 있다가 절벽을 이루면서 연암산과 금호강 사이에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어 산격 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한자표기가 바뀌어 山隔洞에서 山格洞으로 되었다.
●연경동 硏經洞
연경동이라는 이름은 고려 태조 왕건이 이곳을 지날 때 마을에서 글 읽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읍내동 邑內洞
원래 이 마을은 漆谷都護府 官衙가 있던 邑內였다. 읍내동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조야동 助也洞
원래 이 지역은 函芝山 밑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조얏골 또는 좻골 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비슷한 音의 한자를 따 조야동이라 하면서 달성군 달서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38년 대구부 확장에 따라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칠성동 七星洞
칠성동은 이 지역에 있던 칠성바위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원래 칠성바위는 현재의 칠성동 2가에 흩어져 있던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다. 이 고인돌은 7개가 북두칠성처럼 놓여 있었는데, 1795년(정조 19)에 경상감사 이태영이 꿈에 북문밖에 북두칠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곳에 가보니 큰 바위 7개가 북두칠성처럼 놓여 있었으므로 바위마다 아들 7형제의 이름을 세기고 복을 빌었다. 이후부터 사람들은 이를 칠성바위라 부르고 아들이 없는 사람들은 이 바위에 치성을 드렸다. 현재 이 바위는 1973년 대구시민회관이 건립되면서 그 앞에 옮겨져 있다.
●침산동 砧山洞
이 지역에 砧山이라 불리는 산이 있으므로 이곳의 이름도 침산 또는 침산리 라 불러졌다. 1914년에 인근의 옥상동을 병합하여 침산동 이라 명칭하고 달성군 성북면에 편입하였다. 그후 1938년 대구부가 확장되면서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태전동 太田洞
태북산 밑에 위치한 이 지역은 월래 지당, 수평, 큰 이매, 작은 이매 등의 자연부락이 자리잡고 있었다. 1914년에 이들 자연부락을 합쳐 마을 이름을 태전동 이라 하였다.
●팔달동 八達洞
팔달동은 현재 구안국도변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이다. 이 말을은 약400여 년 전 성주 裵씨들이 처음으로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당시 이 마을에 살던 사람들은 마을을 지나 흐르고 있는 금호강의 지류인 八居川과 당시의 행정명인 達城郡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마을 이름을 팔달동 이라고 하였다.
●학정동 鶴亭洞
1. 원래 이 마을은 鶴이 날개를 펴고 머무는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사람들은 鶴停洞 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학은 사람이 가까이 가면 날아간다고 하여 마을 이름에 붙은 '사람 인( )' 변을 없애고 마을의 돌 한가운데에 정자를 세워 鶴亭洞 이라고 하였다.
2.. 1914년에 봉서동 구좌동 천서동 노본동 등의 마을을 합쳐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정하고 이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학익산(鶴翼山)과 정지(亭池)의 이름을 따서 학정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수성구(壽城區) 소재 동명 유래

●가천동 佳川洞
가천동 이라는 이름은 1914년에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동명이다. 즉 이 마을은 주위로 금호강의 맑은 물이 흐르고 금호강변의 경치가 아름다워 가천동 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고모동 顧母洞
원래 이곳의 지형 지세가 이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형제봉을 돌아보는 형세라고 하여 顧母里 혹은 顧母村 이라고 불렀다. 1914년에 현재의 이 지역을 고모동이라 하였다.
●내환동 內患洞
현재의 이 지역은 괵기 안쪽(곶계)에 해당됨으로 안괵기·안곡계·안국기 또는 한자식으로 내곶(內串)내곶계(內串界)라 하였다.
1914년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內串洞이라 하였으나, 內串을 內患으로 오기(誤記)하여 내환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노변동 蘆邊洞
이 마을은 고려시대에 의성 金씨가 처음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는데 마을 주위에 갈대가 무성하여 갈변동이라 불렀다.
현재는 노변동이라 바꾸어 부르고 있다
●두산동 斗山洞
전설에 따르면 아침 일찍 어떤 부녀자가 빨래를 하다가 산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는데, 그 순간 움직이던 산이 그곳에 멈추어 섯다고 하여 그 산을 불뫼 또는 독메산 이라고 하였다. 1914년에 두산동이라 하여 달성군 수성면에 편입하였다가 1938년 대구 부에 편입되었다.
●만촌동 晩村洞
이 지역의 산세가 느즈러졌으므로 느즈미 또는 이를 줄여 느짐·느지, 한자어로 晩村이라 불렀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인근의 각계동, 지장곡을 병합하여 만촌동 이라 부르고 달성군 수성면에 편입하였다. 그 후 일제하인 1938년 대구부 영역이 확장되면서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매호동 梅湖洞
원래 이 지역에는 渭梅洞과 湖洞이라 부르는 자연부락이 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이들 자연 부락을 합하고 이름도 매호동이라 하였다.
●범물동 凡勿洞
이곳 뒷산에서 범이 많이 울었음으로 범울이 또는 범물리 라고 불렀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인근의 泥田里와 佳洞을 병합하여 범물동 이라 하여 달성군 수성면에 편입하였다. 그 후 1938년 대구부 확장 과정에서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범어동 泛魚洞
범어교회가 자리잡고있는 山의 모습이 마치 한 마리의 고기를 연상케 하며 이 산의 서남쪽 아래로 범어천이 흐르고 있었다. 옛날 이 마을에 정착하여 살았던 사람들은 이 산의 형세가 마치 물고기가 입을 벌리고 산아래 흐르는 냇물에 떠있는 것 같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뜰 泛과 고기 魚를 합하여 범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驛이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마을 이름을 泛魚驛 이라고 하였다. 1914년에 범어동이라 명칭하고 달성군 수성면에 편입하였다. 그 후 1938년 대구부 확장 과정에서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사월동 沙月洞
원래 이 지역은 사토리·사돌 또는 沙月·沙月里라 하였는데 1914년에 사월동이라 하였다.
●삼덕동 三德洞
조선시대 밀양 박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당시 이 마을에는 큰 하천이 흐르고 있었는데, 이 하천이 산과 도로를 중심으로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사람들은 외곶(外串)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부터 삼덕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상동 上洞
이 지역은 수성들의 윗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웃골·위동 또는 한자식으로 上村 ·상동이라 불렀다.
●성동 城洞
이 지역 내 자연부락의 하나인 모산골 인근의 산에는 壬辰倭亂 때 쌓은 것으로 여겨지는 성터가 남아있는데 성동이라는 동명은 여기서 유래하였다.
●수성동 壽城洞
원래 이 지역은 수성들의 아랫쪽에 있었으므로 下洞이라 불렀다. 이후 하동의 동쪽에 새로운 마을이 들어서면서 이를 新洞 또는 新下洞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 신동을 하동에 합하여 하동이라 부르고 달성군 수성면에 편입하였다. 그 후 1918년 수성면이 대구부에 편입되면서 수성면의 중심지였던 이 지역을 수성동이라 칭하였으며 1963년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수성1·2·3·4가로 분할하였다.
●시지동 時至洞
옛날부터 이 지역은 서울-안동-대구-경산-청도-부산을 잇는 국도가 통과하는 중요한 교통요지로서 時至院이라는 院이 설치되어 있었다. 현재의 시지동 이라는 동명은 이러한 時至院에서 유래하였다.
●신매동 新梅洞
이 지역은 아산 장씨가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었는데 동네 서쪽으로 흐르던 욱수천이 동쪽으로 흐르게 되자, 종래의 旭水川이 흐르던 서쪽에 새로 동네가 생기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 마을을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으로 新基라 부르고 옛날부터 있던 마을은 신기 안쪽에 자리하고 있어서 內梅라고 불렀다. 그 후 1914년에 신기와 내매를 합쳐 신매동 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연호동 蓮湖洞
이천동의 동남쪽에 위치한 연호동은 원래 그 부근이 지대가 낮은 늪지대였다. 홍수로 금호강이 범람하면 이곳까지 강물이 넘쳐 호수가 생겼는데, 이 호수에는 갈대와 연꽃이 무성하여 사람들은 蓮池라 하였다. 1914년에 이 마을을 연호동이라 하였다.
●욱수동 旭水洞
원래 이 마을을 상동이라고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당시 이 지역에는 맥반석이 많아 물이 맑아서 동명을 욱수동 이라고 명칭하였다.
●이천동 梨川洞
斗斗里峰에서 담티재로 이어지는 산 능선의 동남쪽에 위치한 현재의 이천동 지역에는 마을 앞을 흐르는 작은 시내를 중심으로 예로부터 배가 많이 재배되어왔다. 이천동이라는 명칭은 바로 배나무 梨와 시내 川자를 합하여 동명을 정한 것에서 유래한다.
●중동 中洞
이 지역은 수성들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중동이라 불렀다.
●지산동 池山洞
이 곳 뒷산의 모습이 곡식을 고르는 농기구인 키처럼 생겼다 하여 이 산을 치산 이 지역을 치산리라 불렀다. 1914년에 비슷한 한자음을 붙여 지산동이라 하고 달성군 수성면에 편입하였다. 그 후 1938년 대구부 확장과 더불어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파동 巴洞
옛날에는 수성 못 입구에서 이 마을을 통과하여 가창에 이르는 길이 곧다고 해서 니리미·파짐·파집이라고 불렀다. 그 후 경북 달성군 가창면에서 대구시로 편입되면서 파동으로 불리어 졌다.
●황금동 黃金洞
원래 이 마을의 주변 들판에는 곡식이 황금빛이고 삼림이 울창하여 黃靑里라고 불렀다. 1914년에 인근의 소지천동을 병합하여 黃靑洞이라 하고 달성군 수성면에 편입하였다. 그 후 1938년 대구부 확장에 의하여 대구부에 편입되었는데 황청동을 황천동으로 오기(誤記)하는 경우가 많아 1980년 수성구를 신설하면서 황금동으로 동명을 개정하였다.


중구(中區) 소재 동명 유래

●계산동 桂山洞
본래 대구시 서상면의 지역으로서, ‘계산’또는 ‘계산리’라 하였는데 1914년에 明治町 1정목이라 하였다. 1946년에 계산동으로 고쳤다.
●공평동 公平洞
이 지역에는 원래 대구 지방 법원이 있었는데, 지방법원에서 모든 일을 공평하게 처리하라는 뜻으로 이렇게 불리게 되었다. 대구부 동상면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남성리ㆍ신전리의 각 일부를 합하여 南龍岡町이라 하였다가 1946년부터 공평동으로 불려졌다.
●교동 校洞
향교가 있던 자리라 하여 이렇게 불려졌다. 향굣골 또는 향교동이라 하였다. 대구부 동상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용덕리 일대를 병합하여 東本町이라고 하다가 1946년 행굣골의 이름을 따서 이렇게 불려졌다.
●남산동 南山洞
원래 이 지역은 대구부 서상면에 속했는데 그 위치가 남산 밑이 되므로 남산이라 하였다. 1914년에 南山町이 되었고 1946년에 남산동으로 고쳤다.
●남성로 南城路
이 역시 읍성의 남쪽이라는 의미에서 따온 것이다. '남문밖ㆍ남문의리ㆍ남성밖ㆍ남문의ㆍ남의리 등으로 불려졌다. 대구시 서상면이 있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동산동ㆍ서내동ㆍ남중동ㆍ남하동의 각 일부를 합하여 南城町이라 하다가 1946년에 町을 路로 고쳤다.
●남일동 南一洞
대구부 동상면의 지역으로서 대구부성 남쪽 안이 되므로 남성안, 또는 남성내이라 하였는데 1914년에 전동, 사일동, 사이동의 각 일부를 합하여 남정이라 하다가 1946년대 남일동으로 고쳤다.
●달성동 達城洞
대구부 서상면의 지역으로서 달성이 있으므로 달성리라 하였는데 1914년에 達城町이라 하였다가 1946년에 町을 洞으로 고쳤다.
●대봉동 大鳳洞
1918년 지방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달성군 수성면의 봉덕동과 대명동이 대구부에 편입되는 동시에 두 동의 일부를 합하여 대명과 봉덕의 앞 글자를 따서 大鳳町으로 불려지다가 1946년에 町을 洞으로 고쳤다. 1951년 대구시 남구 대봉 1, 2, 3동으로 분할되고 다시 1980년 4월 남구의 일부가 중구로 합쳐지면서 대구시 중구 대봉 1, 2동으로 양분되었다. 1981년 직할시 승격으로 중구 대봉1, 2동이 되었다
●대신동 大新洞
지금의 대신동에는 조선시대 평양. 강경과 더불어 전국 3대 시장의 하나로 꼽히던 큰장이 있었다. 이 시장을 1920년 서문 밖인 天皇堂 못자리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서문시장이다. 이 못을 주변으로 새로운 동네가 형성되었는데, 이 동네의 이름을 짓기 위하여 '큰 장'이란 말에서 '큰 大'와 '새로 생긴 동네' 라는 말에서 '新을 합쳐 대신동이라 불렀다. 대구부 서상면의 지역인데 1914년에 전동 후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新町이라 하였다가 1946년에 대신동으로 고쳤다.
●대안동 大安洞
대구부 동상면의 지역으로서 1914녀에 후동 일부와 복내동 일부를 합하여 大和町이라 하였다가 1946년에 대안동으로 고쳤다.
●덕산동 德山洞
대구부 복상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에 남성리 일부와 서상면의 남외동 일부를 합하여 아미산에 있는 관덕정의 이름을 따서 德山町이라 하였다. 1946년에 町울 洞으로 고치는 동시에 일부를 갈라서 삼덕동에 넘겨 주었다.
●도원동 桃園洞
대구부 서상면의 지역인데 1914년에 달성동의 일부를 갈라서 八重垣町 이라 하였다. 1946년에 창녀가 많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도원동으로 고쳤다.
●동문동 東門洞
조선시대 대구 읍성의 외곽지에 동문(현 중소기업은행 중앙지점 부근)이 위치하였는데 이 동문을 중심으로 사방 500m를 동문동이라 칭하였다. 대구부 동상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동폐합에 따라 용덕리의 일부를 합하여 東門町이라 하였다가 1946년에 町을 洞으로 고쳤다.
●동산동 東山洞
대구부 서상면의 지역으로서 동산이 있으므로 동산이라 하였다. 1941년에 시장이 있었으므로 市場町 이라 하였다가 1946년에 다시 동산동으로 고쳤다.
●동성동 東城洞
이 명칭은 1736년(영조 12)대구부사 閔應洙가 쌓은 읍성의 동편을 헐어 도로로 이용하여 동성로라 부른 데서 연유한 것이다. 대구부 동상면 지역으로 1914년에 東城町이라 하였다가 1946년에 동성로를 고쳐졌다.
●동인동 東仁洞
대구부 동상면 용덕리 신동 남성리 등 일부가 1911년경 일본에 의해 東雲町으로 개칭되었으며 1946년경 동인동으로 개칭하였다. 1963년에 區制 실시로 지금의 중구 동인 1,2동으로 개편되었다.
●동일동 東一洞
대구부 동상면의 지역인데 1914년에 전동 일부를 합하여 東川代田町이라 하였다가 1946년에 동문 밖 첫마을이라는 뜻으로 동일동으로 고쳤다.
●문화동 文化洞
대구부 동상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에 신동 일부를 갈라서 南旭町이라 하였다가 1946년에 문화동으로 고쳤다.
●봉산동 鳳山洞
봉산이란 현 제일여중에 소재한 자라바위가 있는 산을 말하며 순종 대부터 정오를 알리는 午砲를 발사하였다. 그래서 오초산 이라고도 하였는데, 옛날에는 서낭당이 있어서 붕산 동쪽에 있는 마을을 장숭기라고 하였다. 봉산은 다른 이름으로 연구산, 운구산, 자래바우 산(자라바위 산)이라고도 하는데 지금부터 약 200년 전 한 부부가 자라 바위에 공을 드려 자라 꿈을 꾸고 아들을 낳았다는 전설이 전한다. 대구부 동상면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의 폐합에 따라 南城里 일부를 분할하여 鳳山町이라 하다가 1946년에 봉산동이라 하였다.
●북내동 北內洞
대구부 서상면의 지역으로서 대구부성 북문 안쪽이 되므로 북문안 또는 북문내, 북문내리, 북내리라 하였는데 1914년데 北內町이라 하였다. 1946년에 정을 동으로 고쳤다.
●북성로 1,2가 北城路
이곳 역시 읍성의 북쪽이라는 의미에서 따온 것이다. 대구부 서상면이 있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북내리 일부와 동상면의 일부, 서내면의 일부를 합하여 元町 1, 2정목이라 하다가 1946년에 복성로 1, 2가로 고쳤다.
●사일동 射一洞
대구부 동상서면의 지역으로서 활을 쏘는 사정(射庭)이 있었으므로 사관안마 또는 사일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에 弓町이라 하였다가 1946년에 사일동으로 고쳤다.
●삼덕동 三德洞
일제시대 때는 三笠町으로 불리다가 天德, 地德, 人德을 합하여 삼덕동으로 개칭한 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 대구부 동상면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남성리, 신동의 각 일부를 합하여 삼립정이라 하다가 1946년에 덕산동의 일부를 합하여 이렇게 불렀다.
●상덕동 尙德洞
대구부 동상면의 지역인데 1914년에 용덕리 일부를 합하여 北旭町이라 하다가 1946년에 상덕사의 이름을 따서 상덕동으로 고쳤다.
●상서동 上西洞
본래 대구부 서상면 사무소가 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쇄환동, 서내동의 각 일부를 합하여 上西町이라 하였다가 1946년에 町을 洞으로 고쳤다.
●서내동 西內洞
대구부 서상면의 지역으로서 대구부성 서문 안쪽이 되므로 서문안 또는 서문내리, 서내리라 하였는데 1946년에 西內町이라 하였다가 1946년에 町을 洞으로 고쳤다.
●서성동 西城洞
대구 읍성의 서편을 따라 생긴 도로인 서성로에서 생긴 명칭이다. 대구부 서상면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에 西城町 1, 2정목이 되었다. 1946년에 서성로 1, 2가로 바뀌었다.
●서야동 西也洞
대구부 서상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에 달성동, 후동의 일부를 합하여 橫町이라 하였다가 1946년에 서성로 2가와 수창 사이가 되므로 서야동으로 고쳤다.
●수동 壽洞
대구부 서상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에 쇄환동, 서내동, 남하동의 일부를 합하여 壽町이라 하였다가 1946년에 町을 洞으로 소쳤다.
●수창등 壽昌洞
보래 대구부 서상면의 지역인데 1914년에 후동, 달성동의 일부를 합하여 八雲町이라 하였다가 1946년에 수창초등학교의 이름을 따서 수창등으로 고쳤다.
●완전등 莞田洞
대구부 동산면 용덕리의 지역으로서 왕골밭이 많이 있었으므로 골발 또는 완전이라 하였다. 1914년에 北龍岡町 이라 하였다가 1946년에 완전동으로 고쳤다.
●용덕동 龍德洞
대구부 동산면의 지역으로서 긴 언덕이 있으므로 용둣골 또는 용덕리라 하였다. 1914년에 榮町이라 하였다가 1946년 용덕동으로 고쳤다.
●인교등 仁橋洞
대구부 서상면의 지역으로서 징검다리가 있으므로 징금다리 또는 인교라 하였다. 1914년에 竪町이라 하였다가 1946년에 인교동으로 고쳤다.
●장관동 壯觀洞
대구부 성상면의 지역인데 1914년에 남일동 남중동의 일부를 합하여 西千代田町이라 하였다가 1946년에 진골목의 뜻을 따서 장관동으로 고쳤다.
●전동 前洞
대구부 동산면에 속한 지역으로 경상감영 앞이었기 때문에 앞마 또는 전동이라 하였다. 1914년에 前町이라 하였다가 1946년에 전동으로 고쳤다.
●종로 1, 2가 鐘路
대구부 서상면의 지역인데 1914년에 京町 1·2정목이라 하였다가 1946년에 서울 종로의 이름을 따서 종로 1·2가로 고쳤다.
●태평로 1,2가 太平路
대구부 동산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에 칠성리·용덕리의 일부(1가) 칠성리·후동 일부(2가)를 합하여 幸町, 錦町 1정목이라 하였다가 1946년에 각각 태평로 1, 2가로 고쳤다.
●포정동 布政洞
옛날 이곳에 있던 경상감영의 宣化堂 정문 이름이 布政門이었기 때문에 포정동이라고 하였다. 본래는 대구부 동상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薪田里, 後洞, 射二洞, 각 일부를 합하여 上町이라 하다가 1946년 동명 변경에 따라 이렇게 불려졌다.
●하서동 下西洞
대구부 서상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에 서내동, 쇄한동의 일부를 합하여 서상면의 아래쪽이 되므로 下西町 이라 하였다가 1946년에 정을 동으로 고쳤다.
●향촌동 香村洞
대구부 동상면의 지역인데 1914년에 신천리, 후동의 일부를 합하여 村上町이라 하였다가 1946년데 대구시에서 가장 변화한 곳이므로 향촌동으로 고쳤다.
●화정동 華田洞
대구부 동상면외 지역으로서 섶이 많이 있으므로 섶발 또는 신진, 신천리라 하였다. 1914년에 田町이라 하였다가 1946년에 대구에서 주로 극장이 집결되어 가장 변화하므로 화전동으로 고쳤다.



서구 소재 동명 유래

●내당동 內唐洞
본래의 의미는 당산나무 안쪽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으로 인땅꼴 (안당골 대당곡) 이라 불려졌다. 낙동강 수원지 앞 동남쪽산 아래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세 그루 있었는데 마을에서는 이 나무를 堂山木이라 하였다. 이 나무를 기준으로 안쪽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반대쪽 마을은 바깥땅골(外堂谷)이라 불려졌다. 대구부 달서면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두 마을을 합쳐서 이렇게 부르다가(이 때는 달성군 성서면에 편입)1938년 대구부 구역확장에 따라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1970년 1975년 등의 재편을 거쳐서 1988년에는 일부가 달서구 두류동에 편입되었고 현재 1∼4동까지 있다.
●비산동 飛山洞
옛 이름은 `날뫼'로서 일제시대에는 시목촌(枾木村: 감나무촌)이라 불러졌다. 날뫼는 산이 날아온다 라고 하는 뜻이다. 전설에 의하면 현재의 경부선 철로 양편에 큰못이 있었는데, 어느 날 큰못에서 아낙네가 빨래를 하던 중 갑자기 어두워져 하늘을 쳐다보니 現 달성공원 쪽에서 산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놀란 아낙이 "산이 날아온다"라고 하면서 고함을 치니 서서히 산이 내려앉았다 하여 ‘날뫼’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는 날뫼를 ‘오장최동’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조선 현종 때 해주 오씨를 시초로 하여 인동 장씨ㆍ경주 최씨가 모여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구부 서중면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내비동과 외비동을 합쳐서 이렇게 불렀으며(달성군 성서면에 편입) 1938년 대구부 구역확장에 따라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1975년ㆍ1979년 두 차례의 분동에 의해 1∼7동까지 나누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상리동 上梨洞
원래는 上里라 하였는데 가루뱅이 위쪽이 되므로 이렇게 불렀는데 웃마 라고 도 하였다. 대구부 달서면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가루뱅이ㆍ새방골을 합하여 上里洞이라 하여 달성군 달서면에 편입하였다가 1938년 10월 1일 대구부로 편입되었다. 이웃 지역에 이현동과 중리동이 있었는데 이를 1965년에 상중리동으로 통합했다. 1985년 12월 1일 상리동과 중리동으로 분동 되었다가 현재의 상리동ㆍ중리동ㆍ이현동으로 분리되었다.
●원대동 院垈洞
조선시대에 大櫓院이 있었으므로 원태 또는 원대라 하였다. 대구부 서중면의 지역으로서 ,1914에 용천동을 합하여 원내동이라 하여 달성군 달서면에 편입하였다가 1938년에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이현동 梨峴洞
옛날에는 현재의 이현동에 강물이 흘렀으며 그 강가에 오래된 배(梨)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그 나무에 배(船)를 묶었던 곳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고 가루뱅이 새방골에서 이 마을로 오기 위해서는 고개를 넘어야 했기 때문에 배고개 마을이라 불려졌다.
행정구역의 변천과정은 상리동과 같다.
●중리동 中里洞
중리동은 와룡산 동남쪽 구릉지에 위치하며 윗쪽엔 상리동ㆍ아랫쪽엔 죽전동이 있고 중간 위치에 중리동이 자리잡고 있어 오랜 옛날부터 ‘중리’라는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또는 평리동과 상리동 가루뱅이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중리동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대구부 달서면의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기동를 합하여 중리동이라고 하였고 1938년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이후의 변천은 상리동과 같다.
●평리동 坪里洞
‘들마을’이라는 의미로서 넓은 들판을 끼고 있는 곳에 세워진 마을이라고 하여 이렇게 불려졌다. 다른 말로는 ‘들말’또는 고구랑들이라 하였다고 한다. 대구부 서중면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에 진등골ㆍ도장골을 합하여 평리동이라고 하여 달성군 달서면에 편입되었다.
1938년에 대구부로 편입되었고, 1975년ㆍ1979년에 걸쳐 분동을 거듭한 끝에 1982년 이후 현재 1∼5동까지 있다.


參考
*역(驛)
역은 공문서의 전달, 물품의 수송, 출장 가는 관리들의 숙박을 위하여 제정한 육상 통신 교통 기관이다.
이러한 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취락을 역취락(驛聚落)이라 하며, 서울의 역촌동·역삼동·마장동·말죽거리 및 전국의 역내리·역리·역북리·역양리·역탑리 등이 이에 속한다.

*원(院)
고려·조선시대에 출장 가는 관리와 공용으로 여행하는 사람 및 일반 서민에게 숙식의 편의를 위하여 각 주요 도로나 인가가 드문 곳에 설치했던 숙박시설이다. 평시에는 驛馬와 마부를 대기시켜 교통에 편리를 주었고, 전시에는 봉수제와 아울러 통신 시설의 구실을 했다.
원을 중심으로 발달한 취락이 원취락(院聚落)이며, 양재원·신혜원·삼지원·장호원·이태원 등이 이에 속한다.

*정(町)
일본의 행정구역으로서 우리 나라의 시(市)나 구(區)의 동(洞)에 해당된다.
*(丁目)
일본의 행정구역으로서 우리 나라의 가(街)에 해당됨.
예) 수성 1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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